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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매초성으로 유력하게 비정되어온 대전리산성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 11일 오전 11시 연천 청산면에서 발굴 현장설명회개최
  • 기사등록 2013-09-10 09:14:29
  • 수정 2013-09-10 09: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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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군수 김규선)과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원장 조유전)은 나당전쟁기의 매초성으로 유력하게 비정되어온 연천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에 대한 1차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오는 9월 11일(수) 오전 10시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를 개최한다.
 
대전리산성의 성벽 몸체는 내성벽을 갖춘 협축식으로 외성벽에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은 축성기법을 보여준다. 외성벽은 주로 장방형으로 치석된 편마암계 성돌을 이용하여 품자형(品字形)으로 정연하게 쌓았는데 기저부에서 상단까지의 높이는 최대 13m나 되는 곳도 있다. 이런 성벽 몸체의 축성기법 등으로 미루어  대전리산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삼국시대 후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축조 주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일단 신라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3년(675년) 9월 29일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했는데 우리의 군사가 공격해 쫓아버리고 전마(戰馬) 3만 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 됐다."라는 매초성 전투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매초성에 당의 대군이 주둔했던 사실과 신라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매초성 전투의 승리로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함으로써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되어 이로부터 통일신라시대를 열게 된다.
 
이번 발굴조사는 문헌상의 매초성으로 가장 유력하게 비정되고 있는 대전리 산성의 실체를 파악하고 비정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는 전체 성벽 중에서 남쪽과 남서쪽 성벽 일부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는데 성벽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이미 나당전쟁 이전에 신라가 대전리산성을 축성하고 관리하였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런 성과는 대전리산성이 나당전쟁기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전리산성이 매초성으로 비정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일단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당나라 군대의 주둔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발굴이 성벽을 대상으로만 이루어졌고 발굴된 성벽 또한 전체 681m의 성벽 중에서 단 15m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향후 성벽과 성 내부의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 비정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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