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다 빈치, 정약용.
최고의 학자로 이름난 정약용 뒤에 숨겨진 인생의 스승, 정조가 있었다!
정조의 지지 아래 개혁정치의 최전선에서 조선의 새 미래를 꿈꿨던 정약용과 정조.
■ 22살의 정약용, 정조의 눈에 들다
1783년, 세자책봉을 기념해 열린 생원진사과 시험. 그 중 뛰어난 답안지로 정조의 눈길을 끈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22살의 젊은 유생, 정약용. 정조의 관심 속에 성균관에 입학한 정약용은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친다.
특히 남인출신임에도 정파를 뛰어넘는 유연한 사고로 정조를 흡족하게 한다.
6년 후, 정조는 대과에 합격에 관직에 막 오른 정약용을 초계문신으로 발탁한다.
능력 있는 젊은 문신들을 발탁해 자신의 정치적 세력기반으로 삼으려던 정조에게 정약용은 그야말로 최적의 인재였던 셈이었다.
■ 화성 시대, 정조가 꿈꾸고 정약용이 이루다
1792년, 부친상으로 고향에 가 있던 정약용에게 어명이 내려온다.
수원에 건설할 새 성곽의 설계를 맡기는 정조. 수원 화성 축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해 공을 들인 사업 중 하나였다. 문관 출신의 정약용은 과학적 재능까지 발휘하며 정조의 기대에 부응한다.
성곽 설계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술 소개서인 ‘기기도설’을 참고해 조선의 여건을 고려한 ‘조선판 기중기’인 거중기까지 고안한다. 이러한 정약용의 노력으로 최대 10년까지도 내다봤던 축성 공사기간을 무려 2년 9개월로 단축시킨다.
<만물각>에서는 정약용의 대표적인 발명품, 거중기를 직접 만들어보고 조선의 다 빈치, 정약용의 새로운 면모에 대해 알아가 본다.
■ 비상(飛上)하던 정약용, 날개를 잃다
1794년, 정조는 정약용에게 비밀스런 임무를 명한다.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의 실상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경기도 북부지방으로 파견된 정약용은 당시 흉년으로 더욱 피폐해진 백성들의 참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한다. 본 바를 정조에게 전하며 정조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데…정약용을 병조참의에 제수하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는 정조. 하지만 곧 정약용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천주교문제가 불거지면서 천주교인을 가족으로 둔 정약용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든 것이다. 결국, 정약용은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조정에 불러들인다. 마침내 다가온 재회의 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조는 정약용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군신의 관계를 넘어 사제지간으로, 나아가 동지가 된 정조와 정약용. 4월 26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정조를 향한 정약용의 연군지정, 그날로 돌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