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서 여검사 ‘한열무’역으로 열연한 백진희가 참여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3.1 절 특집 다큐멘터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바로 [SBS 스페셜]이 3.1절 특집으로 준비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편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투쟁한 김학철 선생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진단하는 내용이다.
최초로 공개되는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의 마지막 22일
2001년 9월, 취재진이 중국 연변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12일 째 곡기를 스스로 끊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일체의 부고를 내지 말고 장례식에 초대할 12명의 명단을 직접 작성한 후였다. 그 명단엔 부인도 손자 손녀도 없었다. 오직 그가 혁명 동지로 생각하는 사람들뿐. 85세의 나이, 그가 바로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학철이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취재진은 그 해 6월 그의 마지막 한국 방문부터 스스로 숨을 거두기까지의 상황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그가 생을 스스로 마감한 마지막 22일의 모습은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한국 방문 중 지인들이 지병치료를 위해 주선한 병원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채 중환자가 되어 중국에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와 김학철은 누구인가?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의 후좌장 마을노인들은, 1941년 12월 조선의용군의 치열하고 장엄했던 항일 전투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조선의용군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이 마을 주민들은 전사한 의용대원의 주검을 일본군의 훼손을 막기 위해 100리 밖으로 옮겨와 묻어주기도 했다.


최초로 공개되는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의 마지막 22일
2001년 9월, 취재진이 중국 연변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12일 째 곡기를 스스로 끊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일체의 부고를 내지 말고 장례식에 초대할 12명의 명단을 직접 작성한 후였다. 그 명단엔 부인도 손자 손녀도 없었다. 오직 그가 혁명 동지로 생각하는 사람들뿐. 85세의 나이, 그가 바로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학철이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취재진은 그 해 6월 그의 마지막 한국 방문부터 스스로 숨을 거두기까지의 상황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그가 생을 스스로 마감한 마지막 22일의 모습은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한국 방문 중 지인들이 지병치료를 위해 주선한 병원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채 중환자가 되어 중국에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와 김학철은 누구인가?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의 후좌장 마을노인들은, 1941년 12월 조선의용군의 치열하고 장엄했던 항일 전투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조선 청년들로 구성된 조선의용군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이 마을 주민들은 전사한 의용대원의 주검을 일본군의 훼손을 막기 위해 100리 밖으로 옮겨와 묻어주기도 했다.
취재진이 확인해 보니, 열악하고 굶주린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조선의 대표’라는 생각으로 모범적으로 처신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마을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본군을 마을 밖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썼다.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마을주민 중에는 자식들 이름을 胡愛朝, 胡喜朝(조선을 사랑한다. 조선을 좋아한다)라고 지은 사람도 있었다.
이곳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된 분대장이 김학철이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서 김일성 독재를 비판하다 중국으로 쫓겨났고 중국에서는 역시 마오쩌뚱의 독재를 문제 삼다 10년의 세월을 중국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어. 그러니 나는 이번에 죽으면 무덤이 두 개나 되는 셈이야, 허허”
조선의용대는 1938년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선생 등에 의해 중국에서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훈련단계에서 해방을 맞이한 광복군과 달리, 실제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가담한 무장 독립 단체지만 남에서는 사회주의 단체라는 이유로 북에서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어디서도 제대로 주목 받지 못했다.
14년만의 공개, 그리고, 왜 2015년 지금 김학철인가?
일제의 식민통치와 뒤이은 분단과 독재, 좌우대립 등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 현대사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그 자신이 하나의 현대사가 되어버린 김학철선생이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한 것은 지난 2001년 9월25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 내용을 방송할 수 없었다. 그는 김일성 1인 독재와 우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이며 당시는 대북유화정책이 정점을 치닫고 있던 김대중 정부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2015년은 광복 70년 , 분단70년이 되는 해이다. 김학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남한 내에서 진보보다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더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좌와 우’라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이념을 기준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불의에 항거하고 사익을 배제하고 민족에 우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진보주의자들이 그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김일성의 독재를 혹독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섣불리 김학철을 존경한다고 내세우지 못했다.
한국전쟁과 4.19, 5.16과 그 이후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진 우리의 현대사는 아직까지도 사회 곳곳에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의 싸움이 난무한다. 개인적인 욕망과 집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이념적 주장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러한 소모전속에서 방황하는 한국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에게 김학철 선생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신념을 지키는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란 질문들에 대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갈 프로그램으로 확신한다.